'시대예보 : 경량문명의 탄생'을 읽고...

'시대예보 : 경량문명의 탄생' 읽음

·5분 읽기

저자는 이 책에서 현대 사회에 대한 이름을 붙이고 있다. 균질한 대중을 전제로 한 시대가 지나가고, 자기 완결적인 개체들이 자신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시대가 오고 있다고 한다. 풀스택이 아니라 퀵스택의 시대, 거대 시스템이 개인의 머릿속에서 반복될 수 있는 시대, 저자가 그동안 얘기해온 메시지들이 그렇듯, 이 책 역시 사회에 대한 처방이 아니라 명명이었다. 그래서 메시지는 통찰력 있지만 뾰족했던 것 같고, 뾰족하지만 정답을 주지는 않았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답답함을 느꼈다.

어릴 적부터 추구해온 가치관과 삶의 태도가 중량보단 경량 사회에 빛을 발한다는 효능감을 얻으면서도, 동시에 책의 메시지가 너무 이상적이라고 느껴졌다. 책의 어떤 부분에서는 공허함마저 들었다. 너무 빠르게 변하는 현대 사회의 파도를 직접 타고 있는 입장에서는, 저자가 던지는 다양한 메시지들이 한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고는 해도, 그것들이 내 일상의 마찰까지는 닿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다.

나는 정답을 받고 싶었던 것 같다. 불안정성이 디폴트인 사회에 피로감을 느끼면서, 통찰력 있어 보이는 책이 나의 현실적인 타협을 대신 정당화해주기를 바라지 않았나 싶다.

또 다른 답답함은 현실에 있었다. 얼마 전 떠난 전 직장은 중량문명의 스펙트럼 위에 있는 회사였고, 그에 대한 반발로 조금 더 경량의 회사로 옮겨왔지만, 당연하게도 여전히 중량은 남아있다. 개인의 힘으로 걷어낼 수 없는 레거시와 의존들. 경량을 지향하는 내 효능감이 중량과 부딪힐 때마다 스파크가 튀는 경험을 하고 있다. 그 스파크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책에 묻고 싶었던 것 같다.


책을 곱씹으며 몇가지 생각에 도달했다.

첫째로, 나는 경량과 중량을 같은 원리 안의 변주로 생각했다. ‘결국 규모와 규모에서 오는 효율성의 차이일 뿐 일이 돌아가는 근본적인 원리는 같다’고 생각하며, 둘을 양적 차이 위에서 생각했다. 이 관점에서 보면 경량화는 기존 구조와 정면으로 부딪히는 일이된다. 같은 원리 안에서 더 효율적인 방향을 추구하려면 레거시의 무게를 직접 감당해야 하기 때문에..

저저가 말하는 경량은 약간 달랐다. 양적 차이가 아니라 시대 양식의 변화에 가깝다. 균질한 대중을 전제로한 생산/조직 방식에서, 자기완결적 개체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일하는 방식으로의 전환. 같은 원리 안에서 효율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전제 자체가 다른 것이었다. 이렇게 보면 경량화는 기존 구조와 싸우는 일이라기 보단, 다른 전제 위에서 나의 일을 하는 것이 된다. 애초에 답답함을 느끼는 출처가 다르다.

둘째, 나는 ‘변하지 않는 것’의 의미를 좁게 잡고 있었다. 책을 읽으며 내가 가장 찾고 싶었던 것 중 하나는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가였다. 나는 ‘변하지 않는 것’을 규모와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시스템의 보편성에서 찾았다. 인간이 더 큰 아웃풋과 더 높은 가치를 추구하는 한, 어떤 형태로든 구조와 의존성을 다시 찾게 될 것이고, 그래서 경량문명도 결국엔 미래의 중량문명으로 회귀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시 보면, 내 생각 안에는 또 다른 ‘변하지 않는 것’이 있었다. ‘인간의 물리적,생물학적 한계 때문에 결국 구조가 필요해진다’는 생각, 이 생각은 구조의 보편성보다는 인간이 한 번에 하나씩 시간을 들여 쌓아야 한다는 한계에 더 가깝다. 두 한계 중에 전자인 시스템의 구조에 무게를 두고, 그것을 ‘변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 차이는 작아 보이지만 생각할수록 컸다. 구조의 보편성에 무게를 두면 미래는 결국 같은 패턴의 반복으로 보이고, 경량을 향한 노력 자체가 언젠가 다시 무거워질 길이기 때문에 돌고 돈다. 하지만 인간의 직렬적 한계에 무게를 두면, 미래는 같은 한계 안에서 다른 양태로 펼쳐지는 것이 된다.

셋째, 자기완결성에 대한 오해. 나는 자기완결성을 향해 가고 있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실제로는 외부 의존적이었다. ‘조직의 경량화를 이끈다’, ‘구성원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이런 생각들이 내 머릿속을 꽉쥐고 있었고, 이런 생각들은 내가 무언가를 잘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환경이 따라와줘야 하고, 내가 정말 주변에 좋은 영향을 줘야한다. 즉, 내 생각은 외부가 반응해줘야만 검증되는 구조였다. 자기완결과는 반대의 방향이다.

이를 자각하고 나니, 다음은 내 영향권의 안과 밖의 구분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졌다. 내 일을 잘하는 것은 내 영향권 안의 일, 조직이 어디로 가는지, 동료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는 영향권 밖의 일이다. 그런데 나는 영향권 밖의 결과까지 내가 책임져야 할 것으로 가져오고 있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그 책임을 스스로 짊어진 채로는 답답함이 사라질 수 없다. 결과는 내가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책을 읽고 자기완결성은 외부에 대한 통제력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영향권 밖을 내려놓는 데서 시작한다고 이해했다. 그리고 한 발 더 가면, 내 안의 모순을 허용하는 너그러움까지. 경량인간을 지향하지만 중량의 레거시도 활용하고 싶다는 고런 모순 말이다.

넷째, 부정도 일종의 반응이라는 생각이다. 나는 오랫동안 중량문명을 부정하는 사고를 해왔던 것 같다. 경량을 지향하는 것에서 효능감을 느끼기 어려운 환경에 주로 있었기에 그 반발은 더 심했다. 그 부정의 강도가 곧 내가 경량을 지향하는 사람이라는 증거라고 믿었었다.

그런데 다시 보면, 부정의 강도가 셀수록 그것에 더 묶였다. 무언가를 강하게 거부한다는 것은 그것을 계속 의식하고 반응하는 것이기도 하기에, 정말 자기 길을 가는 사람은 굳이 부정할 필요가 없다. 내가 중량과 부딪힐 때마다 스파크가 튀는 것은, 어쩌면 아직 내가 그 단계에 도달하지 않았다는 신호일지도..

나는 내가 경량인간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근거가 중량에 대한 반발이었다면, 그 반발이 사라지는 순간 내 정체성도 흔들릴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부정을 동력 삼지 않고 내 방향을 가질 수 있다면, 답답함의 상당 부분이 옅어지지 않을까.


답답함은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머리로 처방을 받아들였다고 감정이 따라오지는 않음을 느낀다. 다만 이제는 그것을 마냥 없애야 할 문제로 보지는 않아야겠다. 경량을 지향하면서 중량 안에 있는 사람에게, 답답함은 당연한 거니깐. 그것을 동력으로 쓸 수 있다면 좋고, 그렇지 못한 날에는 그냥 받아들이면 된다.

여전히 풀리지 않은 것이 많다. 조직 안에서 내가 어떤 자세로 일할 것인지, 영향권 안과 밖의 경계를 어디에 그을 것인지, 부정을 동력으로 삼지 않고도 내 방향을 유지할 수 있을지..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은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 다만 질문의 해상도는 전보다는 또렷해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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